Original #04_2023 연말결산
2023년은 액션보다는 생각이 많았지만, 다가올 미래를 위해 꾸준히 준비를 했던 한 해였다.
1. 판을 만들어 가기 위해 준비를 하는 한 해
올해는 금리의 영향으로 전반적인 시장 상황이 이전과는 크게 달라지면서 다른 많은 VC들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투자를 진행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올해 상반기에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볼 수는 없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솔직히 이런 매크로 상황을 개인 역량으로 이겨보기에는 아직 스스로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으로 이어지니 무력감 같은 감정도 종종 들곤 했고, 지금 같은 시기에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하나 마땅히 답이 나오지 않아서 방황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이러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올해 하반기부터는 지금은 기다림의 시간이라는 생각하에 다음 파도에 올라타기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인드셋이 정말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내가 무엇을 해나가야할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고, 오히려 장기적인 관점에서 판을 그릴 수 있는 기회로 삼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에게 요즘이란 시장의 분위기가 바뀌는 시점이 내년이 될지 내후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점이 왔을 때 주인공이 되기 위한 제반 작업들을 하나하나씩 진행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올해 수확이 있다면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 판이 어떻게 형성되어있는지 이전보다 더욱 깊게 알게 되었다는 점이 있겠다. 매크로라는 녀석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었고, 투자의 세계에서 어떤 금융 상품들이 존재하는지, 그 안에서 VC라는 상품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그동안 역사를 써내려온 VC와 금융 기관들은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등을 공부해보면서 게임 내의 플레이어들과 그들간의 관계성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판을 이해하려는 목적은 결국 앞으로의 판을 내가 이끌고 만들어가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을 지켜야할지, 앞으로 잘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을 펼쳐야할지, 우리의 매력을 어떻게 어필해야할지에 대해서 등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다. 즉, 투자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회사의 전략적 방향성을 설정해보기 위한 고민들을 본격적으로 해보기 시작한 것 같다. 아직 '이게 정답이다' 하는건 전혀 없지만, 이 관점을 가진 것이 나중에 큰 자산으로 돌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2. 끊임 없는 자기 성찰 및 반성
기다림의 시기를 보내다보니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엄청 많이 한 해이기도 했다.
먼저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등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선 가면 갈수록 나는 단순한 VC 심사역의 역할만을 해서는 안된다는걸 느끼고 있다. 최종 의사결정자 중 한명으로서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훈련을 하고, 펀드와 회사 차원에서의 고민을 같이 수반하며, 매력을 잘 셀링하는 역할까지 수행해야 명함에 박힌 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담으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던데, 어느정도는 맞는 말인 것 같다.
또한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회사를 만들고 성장시키는 방법에 대한 나만의 방법론을 확립할 필요가 느껴진다. 스타트업을 깊게 알아갈수록 적당히 성공한 회사와 크게 성공한 회사는 근본적인 차이점들이 있으며, 다르게 표현하면 크게 성공한 회사들만의 공통적인 성장 방정식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를 내가 개념적으로 알고 있다면 그런 회사를 찾아낼 확률이 크게 높아질 것이며, 투자한 회사들의 기울기 값을 올려주는데도 탁월함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 생각을 가지고 보니 Elad Gil이 쓴 High Growth Handbook이 내가 생각한 주제에 대해서 그만의 방법론을 그대로 적어놓았다는걸 알 수 있었는데, 나도 내 버전으로 High Growth Handbook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생각을 올해 상반기부터 가지기 시작했지만 지식이 쌓인 것 같지는 안아서 시작을 못하고 있었는데, 내년에는 최소한 시작이라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번 글로 공표했으니 이제는 안하면 안된다).
다음으로 나는 관찰력이 상당히 발달한 사람인 것 같다. 다르게 표현하면 놓치기 쉬울 수 있는 정보 조각들을 잘 수집했다가 그걸 조합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정보 조각을 수집하기 위한 질문 능력도 어느정도는 발달한 것 같다. 이 특성이 잘 발현되어서 나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것 같고, 또한 사람을 보는 눈 또한 괜찮은 것 같다. 두 능력이 VC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들인 것 같아서 다행이다.
부족한 부분들은 너무나 많은데, 대표적으로는 디테일함의 측면에서 부족함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창업가들이 회사 운영 차원에서의 질문을 던질 때 적절한 조언이 즉시 떠오르지 않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데, 이럴땐 내가 경험치가 많이 부족하다는걸 체감한다. 이를 위해서 간접 경험의 인풋을 최대한 넣으려고는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측면에서는 창업가 출신을 이길 순 없기 때문에 결국 나만의 강점을 키우는게 맞는 방향일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아직 시니어 레벨에서의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지 않다. '이런 사람좀 소개시켜줘요'라고 했을 때 바로 누군가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이 없는걸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비교적 잠재성이 높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시간을 많이 쓰는 편이기 때문일 수도 있긴 한데, 밸런스를 잘 맞춰가면서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위의 부족한 요소들은 보통 우리 포폴사를 포함한 파운더들과 대화하면서 느끼는 부분들인데, 그만큼 내가 우리 포폴사들에게 아직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열심히라도 했어야 하는데, 솔직히 올해는 그 기준 또한 스스로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아서 반성, 또 반성하게 된다.
또 하나 반성할 부분은 시간을 더 밀도 있게 보냈어야 한다는 부분이다. 특히 예전부터 강조해왔지만 결국 나란 사람은 누구와 어울리는지가 많은 부분을 결정하는 것 같아서, 배울 점이 많은 사람과 보내는 시간을 더욱 늘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VC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을 만나는데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더더욱. 올해는 관계를 유지한다는 생각으로 원래 알던 사람을 만나는 비중이 높았던 것 같은데 그러다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비중이 작년에 비해 줄어든 것 같고, 그만큼 나의 성장 기회가 줄어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내가 새로운 사람들을 통해 더 많은 성장을 할수록, 내가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나와의 만남을 더욱 귀하게 느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 내가 잘되야 주변에 좋은 사람이 모이는 법이다.
3. 더 나은 투자자가 되기 위해
위의 고민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현재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민은 '어떻게하면 더 벤처 투자를 잘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다. 결국 의사결정 프레임워크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일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 내가 어떤 의사결정 플로우로 투자를 결정하는지를 큰 틀에서 정리해보기도 했고 (참고: 나의 스타트업 투자 의사결정 기준 - 아이템, 시장, 사람), 내가 그동안 만나고 다녔던 사람들과의 미팅록을 돌아보면서 어떤 부분이 맞고 틀렸는지를 확인해보면서 객관적으로 나의 판단력이 어느정도인지 확인해보고 부족한건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결국 이 업을 잘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성장'이라는 결과물이 어떠한 요소들로 이루어져있는지 알고, 그 요소들을 판별하기 위한 힌트를 어떻게 발견하고 끄집어낼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치 딥러닝 학습을 하듯이 잘 성장한/성장하고 있는 회사들의 인풋을 나의 뇌에 최대한 집어넣어서 나만의 신경망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의 나는 그 작업을 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과정에서 포폴사들에게 투자한지 일년이 넘으니 투자한 회사들마다 성과가 나타나주기 시작하는데 여기에서 배울 점들이 매우 많다. 내가 생각했던 가설들이 얼마나 들어맞았는지, 내 기대보다 뛰어난 성과가 나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만약 잘못 생각한 부분들이 있다면 내가 어느 부분을 놓쳤는지 등등 결과를 두고 원인들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생각해보면서 신경망을 업데이트 해나가고 있다. 역시 사람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방법은 실행의 결과물을 돌아보며 배우는 피드백 루프를 잘 설계하는 것인 것 같다.
사람의 대한 학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지만, 그만큼이나 산업적으로도 꾸준히 스터디를 진행해왔다 (텔레그램과 뉴스레터 보시면 어느정도 보이시죠? ㅎㅎ). 특히나 올해는 AI에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 같은데, 고민해온 것들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연말에 AI 리서치 클럽을 운영하기도 했다. VC라는 산업에 대해서 공부할수록 결국 이 게임은 power law 게임이고 최소 x10 이상을 추구해야한다는걸 알게 되는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변곡점에 올라타는 플레이가 필요하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플레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더더욱 AI와 블록체인 같은 차세대 기술 베이스의 회사에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AI의 경우 게임 체인저라는 느낌을 가면 갈수록 더욱 강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게 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알토스가 모바일 시대의 주인공이 된 것 처럼, 우리가 AI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글을 읽으면서 느끼셨겠지만 나는 일년동안 VC라는 업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온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블로그에 몇 편의 글을 남겨놓았다 (참고1, 참고2). 또한 낭만투자파트너스 인터뷰에서도 이에 대한 이야기들이 일부 담겨 있다. 2년 가량 VC 업을 경험해본 결과 일년 이상 경험해본 결과 나는 이 업을 누구보다 즐기는 편이며, 그리고 호기심, 관찰력, 주의 깊게 듣고 좋은 질문하기 등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직업이라는 생각도 확고해져서 이 업을 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행위 자체는 할 수 있는 한 계속하지 않을까 싶다.
4. 앞으로의 나의 방향성
그렇다면 내가 VC만 하고 살 것이냐? 그건 분명히 아니다. 이 업계에서는 종종 '저의 앤드 커리어는 VC에요'라는 말을 듣곤 하는데, 나의 경우는 스타팅 커리어가 VC일뿐 이걸 활용해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무수히 많다고 생각한다. 특히 요즘의 나는 투자 대상을 스타트업 이상으로 확장해나가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 같고 (한가지 예시로 스테이지 측면에서 그로스 캐피탈 플레이가 흥미롭다), 그 이상으로 금융 투자회사를 직접 만들어보는 방향성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이는 내가 좋아하는 창업과 투자라는 키워드를 동시에 발현할 수 있는 길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하면 딜을 만들고 돈을 가져오는 구조를 설계할 수 있을지, 어떤 투자 철학을 만들어갈지 등의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온 생각들이 오늘의 글에 담기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방향성 또한 여러가지 선택지들 중에서 일부에 해당할 뿐이며, 나는 결국엔 판을 넘나드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내가 직접 판을 그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 관점에서 올해는 특히 샘 알트만과 박현주 회장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샘 알트만은 OpenAI를 경영하고 있는 현재에도 세상에서 가장 활발한 스타트업 투자자중 한명이며 OpenAI 회사 차원에서도 여러가지 투자건들을 주도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내가 쌓고있는 역량들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고, 박현주 회장으로부터는 한국에 필요한 투자 상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하면서 한국 금융 시장의 판을 이끌어왔다는 측면에서 결국 새로운 일을 해야만 위대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걸 배울 수 있었다. 즉, 지금의 내가 쌓고 있는 역량은 단순히 벤처 투자에만 적용되지 않는다는걸 알게 되었으며, 나만의 실력을 계속해서 키워오다가 시장에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남들이 보고 있지 못하는 기회가 나에게는 보이기 시작했을 때 강하게 베팅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 고민들은 지금 당장은 우선순위는 아니지만, 나를 돌아봤을 때 나는 시기마다 주요하게 품고 있던 생각들이 바탕이 되어 5년뒤 미래가 결정되었다는걸 알고 있기 때문에 미리 고민하고 있다고 이해해주시면 되겠다 (참고: 5년 단위로 바라보는 내 인생의 선택과 집중).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일은 벤처투자자라는 직업에서 최고가 되는 일이다.
5. 경험을 통해 배운 것들
지금까지 올 한해동안 지녀온 업에 대한 고민을 나눠보았는데, 이외에도 일련의 경험들을 통해서도 많은 배움들이 있었다.
투자: 투자를 업으로 삼고 있는 만큼 개인 투자 또한 잘해야 최소한 투자자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과, 여러 시장을 더 넓게 이해할 수록 벤처 투자에도 무조건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올해는 더더욱 개인 투자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국내, 해외, 비상장을 대략 비슷한 비중으로 운용해왔는데, 각기 비슷하면서도 다른 관점으로 투자를 진행했다. 국내 주식 같은 경우에는 장기적으로 우상향 할 것이라고 믿는 반도체+바이오+콘텐츠 산업 등에서 성장성이 살아있는 기업들 위주로 투자했고, 저축의 차원에서 국내 리츠 종목 또한 모아가기 시작했다. 해외 주식은 훌륭한 기업을 적당한 가격에 담는다는 퀄리티 투자를 지향한다는 관점으로 10개 조금 더 넘는 기업에 분산투자를 해놓고 주가가 떨어질 때마다 꾸준히 매수를 진행했고, 약간의 바벨 전략을 섞는다는 생각으로 리스크 대비 수익률이 높을 것 같은 종목들도 소량 담아보는 플레이를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비상장 시장에서는 펀더멘탈 대비 너무 가격이 저렴하다고 생각되는 종목을 매수했다. 결과적으로 비상장에서의 수익이 가장 높았고, 해외 주식은 준수했으며, 국내 주식은 비중을 크게 가져간 종목이 성과가 좋지 않아서 시장을 이기지 못했다. 셋 중에서는 해외 주식에 투자한 방법이 가장 마음이 편하면서도 성과도 나쁘지 않아서 내년에는 해외 주식 비중을 계속해서 늘려나가볼 생각이다.
회사 차원에서는 올해 2월달에 진행한 바인드(애슬러) 딜이 사실상 올해의 유일한 딜이었는데 그만큼 기억에 남는다. 김시화 대표는 오래간만에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파운더였는데, 고민의 깊이, 실행력의 디테일, 꿈의 크기 등등 대학생 창업이라고 보기 힘든 면모들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시화 대표가 나와 우리 회사를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카톡 하나하나에도 상당히 신경을 썼고, 시나리오를 그리면서 나름대로의 상상을 발휘하고, 여러 액션들을 취하는 등 온 신경을 몰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투자가 결정된 이후로도 최대한 빠르게 납입하기 위해서 집중하던 기억도 생생하다. 오래간만에 '살아있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순간이었고, 역시 나는 일하는걸 좋아하는구나 다시 한번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참고로 바인드에 투자하게 된 이유는 블로그에 글로 남겨두었다 (참고: 애슬러를 운영하는 바인드에 투자했습니다).
여행: 4월달에 도쿄 여행을 통해 시야를 많이 넓혔던게 기억난다. 특히 나중에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일하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다짐을 했었던 것과, 내가 4년동안 크게 성장했다는걸 느끼면서 시간의 소중함을 크게 느끼게 된 것이 도쿄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참고: 4년만에 도쿄를 갔다 오면서 느낀 것들). 또한 올해는 국내 여행의 빈도를 늘렸는데, 부산을 두번 방문했고 춘천과 포항도 놀러갔다왔다. 부산에서는 부산항을 보면서 부울경 경제에 대해서 찾아보았던 기억이 떠오르고, 춘천은 고등학교 친구를 보러 간 여행이었는데 이 친구가 내가 춘천까지 와준걸 너무 고마워해서 덩달아서 나도 감사했던 기억이라서 소중하게 간직 중이며, 포항에서는 국가 경제 발전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는 포항제철소를 견학하면서 앞으로 포항제철같은 역할은 어떤 산업이 해줄 것인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당장은 바이오 CDMO 비즈니스인 것 같다). 이외에도 피카소 도자기를 보러 갔던 청주, 파라다이스와 인스파이어 리조트를 구경한 인천, 음악과 미술도서관의 공간감이 궁금해서 찾아간 의정부, 콩치노 콘크리트에서 음악을 감상한 파주 또한 기억에 남는 당일치기 일정들이다.
이사: 올해 1월에 건대입구에 있는 오피스텔로 전셋집을 구해 이사를 왔다. 원래는 살고 있던 왕십리 근처로 전세를 구해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시세가 비싸보였다. 그래서 다른 지역까지 넓혀서 찾아보다가 건대의 신축 오피스텔을 알게 되었는데, 위치도 회사와 학교의 중간에 위치하고, 뷰도 좋고, 가격도 왕십리보다 저렴해서 바로 결정했다. 그리고 원래부터 자양동은 아직 서울에서 저평가된 지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근처에서 거주해보고 싶었던 마음도 작용했다. 거주지를 알아보다보니 지역별로 어느 정도의 가격대가 형성되어있는지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되었고, 이게 상당히 재밌어서 이사한 이후로도 호갱노노로 지역별 아파트 값을 찾아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문제는 지난번 월세 계약할 때는 하루면 뚝딱이었기 때문에 전세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출을 너무 쉽게 보았다. 신축 오피스텔 대출이 쉽지 않다는걸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여러 은행들을 돌아다녀도 리스크 때문에 해주려고 하지 않더라. 5개의 은행을 돌아다녔는데 안해준다는 말을 듣고 거의 포기하려고 하던 차에, 마지막으로 들린 은행에서 해당 오피스텔은 자신들이 이미 한번 해봤다고 해줄 수 있다고 이야기되면서 결국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은행마다, 그리고 사람마다 대출 가능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는걸 알게 해준 이벤트였고,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걸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이벤트이기도 해서 기억에 남는다. 결과적으로 대출을 잘 받은 덕분에 이전 집보다 더 적은 지출로 더 넓은 집에서 거주하고 있어서 너무 만족한다.
기타: 올해 초에 월마트 투자팀이 메타버스 관련 회사들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우리가 메타버스 관련 스타트업들을 우리 사무실로 초대하여 연결해드렸던 일이 있었다. 외국인 손님들을 맞이하는건 태어나서 처음이었고, 이런 비즈니스 미팅을 조율해보는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모든게 새로웠던 경험이었다. 돌아보면 결국 월마트 측에서 만족할만한 회사를 소개해주느냐가 핵심이었고, 결과적으로 다양한 특성을 가진 스타트업을 소개드린 덕분에 비교가 잘 되어서 어디랑 아젠다가 잘 맞는지 등을 잘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를 통해 배운건 그들의 니즈를 사전에 디테일하게 파악해서 최대한 니즈에 맞는 회사를 소개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글로벌한 인재가 되어서 이러한 비즈니스 미팅들을 자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작년 12월에 해치랩스의 부탁으로 'Web3 생태계 투자 현황 및 향후 전망'이라는 발표를 한 이후로 올해도 다양한 주제로 발표할 기회들이 많았다. 'Generative AI 향후 전망 및 기회'라는 주제로 여러번 발표를 진행했고, 연세대 BIT 학회에 가서 '내가 리서치를 하는 방법'에 대해서 짧게 발표했으며, 연말에는 학교 과제로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품질 경영 & 디지털화 대응'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학교다니면서 내가 발표한 수업은 다 A+ 나왔다 후훗). 나는 발표를 할 때마다 좋은 피드백을 받는 편인데, 개인적으로는 스토리텔링을 잘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발표 플로우를 짜는건 한 편의 글을 작성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글을 쓰는 습관이 발표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또한 사람들이 어떤 내용을 듣기를 원할지 상대적으로 잘 상상해내는 것 같기도 하다.
연말에 진행했던 AI 리서치 클럽은 개인적으로 블로그-뉴스레터의 다음을 잇는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한다. 한달동안 푹 빠져 몰입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소중했고, 지식과 사람과 브랜딩까지 얻게 된 경험이었다. 게다가 업무 차원으로도 확장 가능한 부분들이 많이 보여서 앞으로 활용 가능한 리소스를 채워둔 느낌이다. 역시나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일단 뭐라도 해보는게 나은 것 같으며, 무언가를 해두면 미래에 예상치 못한 새로운 기회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걸 다시 한번 체감한다. AI 리서치 클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최근에 올린 글에 담겨있다 (참고: AI 리서치 클럽을 운영하며 느낀 점들).
6. 올해의 콘텐츠
매년 그랬던 것 처럼 올해 인상깊었던 콘텐츠와 경험을 공유해본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겐 이 세션이 가장 유용할 것 같다.
올해의 책: 올해는 총 45권을 책을 읽었다.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도 많았고, 독서모임도 많이 하다보니 작년에 비해서 조금 더 독서량이 늘었던 것 같다. 원래부터 나는 경영과 투자 관련한 책을 주로 읽어왔지만, 올해는 특히 투자와 관련된 책의 비중이 늘어난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내가 투자업에 관심이 많았던 해라는걸 보여주는 것 같다.
투자와 관련해서 읽은 책들 중 '작지만 강한 기업에 투자하라, 더 레슨, 워런버핏 머니 마인드, 자유로운 투자자, 한국형 가치투자, 노마드 투자자 서한, 비즈니스 오너 펀드 투자자 서한, 딸아 돈 공부 절대 미루지 마라,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보수적인 투자자는 마음이 편하다, 퀄리티 투자 그 증명의 기록, 투자도 인생도 복리처럼, 찰리 멍거 바이블, 100배 주식, 투자의 진화'는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올해는 특히 여러 편의 투자 서한들을 읽으면서 주식 투자 관점을 깊게 고민해볼 수 있었고, 버핏과 멍거 등의 여러 대가들의 관점을 보면서 투자 철학과 마인드셋을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 한 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와 투자의 진화는 업에 대한 고민의 힌트가 많이 담겨있어서 밑줄로 가득찬 책이 되었다.
경영과 관련해서는 '이와타씨에게 묻다, 픽사 위대한 도약, 드림 빅, 셀트리오니즘, 일론 머스크 전기'를 인상 깊게 읽었다. 일론 머스크 전기가 올해 읽은 책중에서 단연코 가장 배울 점이 많았고 (참고: 영감을 주는 일론 머스크), 이와타씨에게 묻다와 픽사 위대한 도약 또한 일론 머스크 전기 만큼이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이라서 강추!
올해의 아티클로는 폴 그레이엄의 '위대한 일을 하는 방법 (How to Do Great Work)'을 선정한다. 나는 예전부터 '위대한'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시작부터 정교한 방향성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왔고, 따라서 위대한 성과를 이룬 인물들의 인생을 조사하면서 힌트를 얻어오곤 했는데, 위대한 인물을 여럿 만나본 폴 그레이엄께서 감사하게도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정리해주신 소중한 글이다. '분야를 선택하고, 최전선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배우고, 지식의 빈틈을 발견하고, 이 중 유망한 분야를 탐색한다'는 큰 틀 안에서 디테일까지 다루고 있는 귀한 글이니 읽어보시면 분명 영감을 받으실 수 있을 것이다.
올해의 공연: 난 올해 클래식 공연을 한달에 한번 정도는 들은 줄 알았는데 예매 내역을 돌아보니 6번 들은게 전부더라. 아무튼, 운 좋게 갔던 정명훈이 지휘하고 임윤찬이 협연한 뮌헨 필하모닉 공연은 내가 가본 클래식 공연 중에서 거의 최고로 좋았던 것 같다. 임윤찬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했는데 이야... 음유시인 그 자체였고, 앵콜로 쇼팽 이별의 곡과 리스트 사랑의 꿈을 연달아서 연주해줘서 사랑이란 키워드를 음악으로 경험하는 아주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어서 2부에서는 베토벤 3번 영웅 교향곡을 실황으로 처음 들어볼 수 있었는데, 모든 악장이 완벽했지만 특히 2악장이 얼마나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악장인지 깨닫게 된 연주였다. 정명훈의 혼이 담긴 지휘를 보면서 마치 심해 밑바닥까지 갔다온 그러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 앵콜 곡으로 아리랑까지 들려준 이날의 공연은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공연이었지 않나 싶다.
여담으로 작년까지만 해도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딱히 없다고 대답해오던 나인데, 올해부터는 클래식 공연장 방문하기라고 답하기 시작했다 (앞에 '고상해보일 수 있는데'라는 말을 꼭 붙인다 ㅋㅋ). 클래식 공연장을 방문하면 몰입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게 가장 좋은 것 같고, 실황을 들으면 음악의 몰랐던 부분들을 많이 알게 된다는 점에서 음악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지휘자를 보면서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매번 느낄 수 있는 것도 좋다. 게다가 건대로 이사한 덕분에 롯데콘서트홀이 가까워져서 심리적인 부담감도 훨씬 줄어들어서 좋다.
올해의 전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에드워드 호퍼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전시를 보며 "자신의 작업물엔 미래에 대한 힌트가."라는 메모를 남겼다. 부산에서 열린 무라카미 다카시의 개인전도 현대 미술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작가가 어떤 작업들을 통해 성장해왔는지 조망해볼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여담으로 이 전시를 보러 부산까지 갔던 것인데, 이것만 보기 아까워서 이우환, 콰야, 김선우, 이슬로 작가 전시까지 다 돌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아니쉬 카푸어 전도 캔버스 작품들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좋았어서 기억에 남는다.
올해의 영화: 난 이상하게 영화를 볼 여유를 쉽게 가지지 못해서 올해도 영화는 몇 편 안보았는데, 그래도 아이맥스로 본 오펜하이머는 자체 평점 5점을 매길만큼 흥미롭게 감상했다. 플롯의 관점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풀어낼 수 있다는 부분에서 다시 한번 놀란 감독의 탁월함을 맛볼 수 있었다. 참고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가 오펜하이머 다음으로 높은 평점을 매긴 영화다.
올해의 게임: 오랜 기다림 끝에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을 영접했다. 오랫동안 기다렸기에 기대치가 높았는데, 기대치 이상의 게임이 탄생해서 다시 한번 닌텐도를 리스펙하게 되었다. 내 생각엔 젤다의 전설 하나만을 위해서라도 닌텐도 스위치를 살 가치는 충분한 것 같다.
올해의 맛집: 나는 지도에 천 개가 넘는 맛집들이 저장되어있는 사람인만큼 올해도 맛있는걸 많이 먹고 다녔는데, 그중에서도 건대에 있는 '선명'이라는 이자카야가 베스트다. 여기 음식은 진심으로 전부 다 맛있는데 특히 항정살이 기가 막힌다. 아담한 가게라서 자리가 많지 않은 탓에 더 유명해지면 안되는 곳인데, 그래도 이만한 식당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소개해본다.
올해의 소비: 올해는 큰 소비는 없었지만 소소하게 사고 싶은 것들은 사보았던 한 해였는데, 조보이의 리멤버 미라는 향수를 산게 가장 잘한 소비같다. 사람들에게 나라는 사람을 좀 더 각인시키고 싶어서 나만의 시그니처 향수를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퍼퓸투데이라는 쇼핑몰에서 관심이 가는 향수 시향지를 여러개 주문해서 고르고 고른 것이 바로 이 리멤버 미다. 은은하게 달달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향이 나는, 마치 밀크티와 비슷한 향인데 매일 뿌려도 질리지 않는다.
올해의 공간: 바로 떠오르는 공간이 없어서 핸드폰으로 올해 찍은 사진들을 쭈욱 돌아보았는데 한강 사진이 정말 많이 찍혀있더라. 그래서 올해의 공간은 한강으로 선정했다. 사실 올해는 성장하는 마음도 잘 안들고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겹쳐있어서 상당히 힘든 한해이기도 했는데,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버티기 위해 한강에 나가서 자전거를 타거나 뛰어다녔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아름다운 노을이 나를 마주해져서 기분을 달랬던 기억들이 새삼스럽다.
한강과는 반대로 종로에 있는 모자이크 가회동을 방문했을 땐 도파민으로 가득찬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는데, 여기 지하에 있는 포커룸에서 포커를 치다보면 밤이 순식간에 사라져있곤 했다. 여담으로 포커는 나 자신이 어떤 확률 값에 베팅하는지를 보면서 나 자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고, 이는 상장 주식을 할 때도 비슷한 확률 계산과 베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도움이 많이 되는 게임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여유로웠던 공간은 의정부에 있는 아나키아라는 대형 카페인데, 라이브로 클래식을 연주해주는 덕분에 생각하기 참 좋았다.
마지막으로
상대적으로 쉽지 않은 한 해였고, 실제로 성과라고 부를만한 아웃풋도 많지 않다는걸 알고 있었기에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반성문으로 가득찬 글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글을 작성하다보니 여러가지 고민을 하면서 꽤나 유의미하게 시간을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쉬운 부분들도 정말 많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미래를 위해 준비를 하는 한 해로서 제 역할을 해준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내년부터는 올라갈 일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이왕 올라가는 김에 열심히 잘해서 크게 올라가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들 일년동안 수고 많으셨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